'뭐든지 겪어봐야지 안다'고 말을 많이 하지만, 때로 겪었기에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들도 있다. 어떤 신드롬이 사회를 휩쓸고 지나갈 때가 그렇다. 그 신드롬이 왜 사회를 휩쓸고 있는지, 신드롬의 알맹이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 신드롬이 우리가 열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당장 그 안에 있을 때는 알지 못한다. 이 때 그 일을 '겪는다'는 건, 곧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그 바람이 사회를 한바탕 쓸고 지나가면,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시점에 이르러 우리는 새삼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들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 전국을 열광과 논란과 좌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황우석 전 교수의 줄기세포 사건이 바로 그렇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도 있는 기적을 눈 앞에 두었다는 믿음 아래,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저널리즘의 노력까지도 '더럽고 선정적인 묻어가기'로 조롱당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십여년 간 신뢰 받았던 보도 프로그램은 하루아침에 매국노 취급을 받았지만, 이후 문제 제기가 진실로 드러났을 때 사회에는 맹목적 믿음이 깨졌다는 좌절의 여파과 함께 그 믿음에 매달린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이들이었는지 새삼 보여지면서 극도의 부끄러움이 깔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그 믿음을 놓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성과 합리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이지만, 이토록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이성과 합리를 스스로 놓아버리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만난다. 이 문제적 사건을 영화화한 <제보자>는 만약 수많은 편가르기가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서야 할 편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를 끊임없이 깨어있게 할 '진실'의 편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에 이장환(이경영) 박사의 줄기세포 복제 연구 신드롬이 불고 있다. 세계 생명공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주인공으로서 이장환은 나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위상을 과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NBS 시사프로그램 'PD추적'의 윤민철(박해일) PD에게 이와 관련된 제보가 날아드는데 '이장환의 줄기세포 연구에 사용될 난자가 불법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신드롬에 반하는 소재이기에 방송국 사람들은 취재를 만류하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데 동물적일 만큼 마음이 향해 있는 윤민철은 아랑곳않고 취재에 나선다. 그런데 이장환의 연구팀에서 일하다 그만둔 제보자 심민호(유연석)와 어렵게 만난 자리에서 윤민철은 충격적인 얘기를 듣는다. 줄기세포는 처음부터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심민호는 자신에게 증거라곤 없다고 말하지만, 윤민철은 그에게서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 진실을 외면해선 안될 언론인으로서 반드시 취재해야 할 아이템이지만, 전 국민이 이장환을 우러르고 있는 이 시점에 불어닥칠 후폭풍의 크기는 가늠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이장환 측도 보통은 넘는지라 윤민철과 심민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붙기에 이른다. 최악의 경우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채 한국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는 상황, 도박에 가까운 그들의 추적은 과연 결실을 볼 수 있을까.
<제보자>의 모티브가 된 황우석 줄기세포 신드롬이 한창 불어닥칠 때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 때에는 사회 돌아가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MBC <PD수첩>의 황우석 관련 보도 소식을 듣고 '<PD수첩> 그렇게 안봤는데 갑자기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 황우석 바람이 나라 안에 얼마나 거세게 불었는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물론 세세한 전개 과정은 영화로 옮겨지면서 일부 변형된 것도 있긴 하지만 (영화에선 '줄기세포 논문 조작' 이슈까지 모든 내용이 취재된 후 방송이 나가지만, 실제로는 '난자 매매 의혹' 이슈가 방송에 먼저 나간 후 파장이 일었다) <제보자>는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면면을 꽤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진실을 추적하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 그 세력과 손을 잡은 또 다른 언론과 그 또 다른 언론의 보도에 매혹된 대중 등 사건을 둘러싸고 사회 각 계층의 대립 양상이 상당히 스릴 있게 펼쳐진다. 영화보다 더 무서운 게 현실이라고, <제보자>는 굳이 자극적인 양념이나 극단적인 설정을 덧붙이지 않고 당시 사건을 복기하는 데 집중했음에도 여느 오락영화 못지 않은 긴장감을 뿜어낸다. 대중영화적 코드와 적당한 유머, 진정성 어린 인간미를 성공적으로 배합했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때의 역량을 임순례 감독이 또 한번 되살린 듯 하다. 인위적 설정을 배제하다 보니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후반부에서의 폭발력이 생각보다 약한 부분도 있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제보자>는 사회고발극이기 이전에 충분히 재미있는 스릴러다.
다른 데 한 눈 팔지 않고 영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만을 좇는다는 것은 <제보자>가 지닌 큰 장점 중 하나다. 여기서 이 영화가 사회적 의미 부여 이전에 극적 재미로 먼저 승부하고자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실화 소재 영화라고 해도 중심 사건에 돌입하기 앞서 사건에 뛰어드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프롤로그를 자주 푸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전후사정에 대한 부연 설명 없이 시작하자마자 본론에 돌입한다. 아마 사건 속에서 인물들이 취하는 태도 자체가 그들의 캐릭터를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의지 덕분에, 인물들은 사건 속에서 뜨겁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리고 사건은 인물들의 가치관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장으로서 활기를 얻게 된다.
사건을 겪을 당시에 우리는 한복판에 있는 경험자로서 얼떨떨한 상태로 그 광풍에 휩쓸렸지만, 영화를 보는 지금에 이르러 우리는 관찰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관찰자로서 바라보는 영화 속 광풍의 모습은 새삼 거대하고 매섭고 또 무섭다. 대중은 이장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바탕으로 'PD추적' 제작팀을 향해 격하게 의사 표시를 하는데, 그 형태는 계란 투척부터 촛불집회, 1인 시위까지 다양하다. 계란 투척과 욕설 같은 비이성적 행위들도 있지만, 촛불집회나 1인 시위 같은 우리가 평소 의사 표시를 위한 평화적 수단으로 여겼던 행위들까지 그릇된 믿음 위에서 행해지고 있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새삼 섬뜩해진다. "경제도 어려운데 어디서 꺵판이냐", "진실보다는 국익이 먼저지 않냐" 따위의 말들은 지금 어디선가 들린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귀에 익다. 이렇듯 이성보다 맹신에 의지해 이장환의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하고 'PD추적'을 성토하는 대중의 면면은, 지금에 와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동시대성을 지닌다.
촛불집회나 1인 시위 같은 풍경도 살벌하게 보이게 하는 이 영화를 두고 '그래서 어디 편이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진실의 편'에 서 있는 듯 하다. 영화에서 이장환은 얼핏 자신의 영달을 위해 본심을 철저히 감추는 악인으로 묘사되는 것도 같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영화가 결국 맞서는 대상은 이장환이라기보다, 그릇된 믿음으로 그의 말 하나하나까지 신처럼 숭배하는 이상한 태도를 지닌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장환은 어떻게 보면 사회의 그 맹목적 믿음을 통해 어쩌다 신격화된 존재일 수도 있고, 점점 더 악해지는 듯한 그의 모습은 어쩌면 여론의 맹신이 만든 모래성 위에서 자신의 위상을 지키기 위한 그릇된 몸부림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세간을 뒤흔든 무시무시한 신드롬은 이장환 혼자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목적을 위해 차분한 이성과 판단력은 버리고 그를 치켜세우기로 한 여론의 몰아붙임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제보자>는 어떤 경우에도 진실이 버려져선 안된다고 말한다. 'PD추적' 팀은 똑같이 언론인의 명패를 달고 사는 신문사나 타 방송사들로부터도 질타당하고, 같은 방송사의 이사진들로부터도 격려는 고사하고 압박당하기 일쑤다. 그들이 'PD추적' 팀을 그토록 몰아세우는 것은, 돈이나 권력 같은 다른 목적을 위해 진실을 '취사선택'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정의보다는 실질적 이득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더 따지는 언론, 정부, 각종 단체에게 진실은 목적 달성을 위해 언제든지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윤민철 PD나 심민호 같은 사람들은 진실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곧 이익일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고, 거짓을 계속 숨길 경우 더욱 커질 피악영향을 차라리 일찍 방지할 수 있고, 정신 바짝 차리고 세상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언론은 그렇게 진실이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누구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도록 인도해야 할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여기에도 언제나 깨어있어 줄 대중의 도움이 필요한 건 물론이다. 결국 대중은 진실을 추구하는 데 있어 최고의 우군도, 최악의 적군도 될 수 있다.
배우들의 알찬 연기는 영화가 추진력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취재를 이끌어가는 'PD수첩'의 윤민철 PD를 연기한 박해일 배우는 외유내강형 캐릭터를 매끄럽게 연기하면서 극을 신뢰감 있게 이끌어나간다. 진실을 추구하는 저돌적 언론인이지만 부담스럽게 몰아붙이지 않으며, 능글맞음과 인간미를 골고루 드러내며 극을 물흐르듯 자연스런 전개로 이끈다.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고도 강단 있는 말투와 눈빛에서 캐릭터의 뚝심이 느껴진다. 한편 제보자 심민호 역의 유연석 배우는 근래 나온 영화에서 처음으로 선량한 인물을 연기하는데, 그게 상당한 진심이 묻어나온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 먹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가족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혼란을 겪기도 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에선, 천성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는 따뜻한 선의가 느껴진다. <응답하라 1994> 이전의 작품들에서 대체로 매서운 악역을 연기했던 걸 떠올리면 그의 그런 변신은 괄목상대의 수준이다. 여기에 신드롬의 중심에 선 이장환 역의 이경영 배우가 대단한 장악력을 보여준다. 농담삼아 '요즘 한국영화는 이경영이 나오는 영화와 나오지 않는 영화로 나뉜다'고 하지만, <제보자>에서 이경영 배우의 연기는 특히 두드러진 카리스마로 관객을 휘어잡는다. 특유의 선량한 미소 뒤에 숨은 탐욕과 혼란이, 감정의 외적인 폭발 없이도 입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양념 같은 조연에 머물지 않고 극의 중요한 한 축을 굳건히 담당하는 인물로서 작심한 듯 강렬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심민호와 갈등과 화해를 겪는 아내이자 이장환 연구진 중 한 명인 김미현 역의 류현경 배우, 윤민철을 묵묵히 도와주는 선임 PD 이성호 역의 박원상 배우, 윤민철을 돕는 당찬 새내기 에이스 PD 김이슬 역의 송하윤 등 연기 구멍 없는 배우들의 활력이 영화가 거두절미하고 질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안타깝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보자>는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기에 철저히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한 영화이면서도 한편으론 판타지에 가깝기도 하다. 모두가 반대했던 취재를 통해 결국 진실을 밝힌 당사자들이 여전히 지금의 현실에서도 증인으로 존재하며 그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충분히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들의 안목과 시청자의 판단력을 믿고 문제적 방송을 내보냈던 당시의 방송국이 현재도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자신하기 힘들기에, 영화 속 이야기는 지금에 와서 구현하기란 쉽지 않은 헛헛한 판타지가 된다. 이제 막 10년이 흘렀을 뿐인데 말이다. 각자의 계산과 탐욕을 바탕으로 세상을 그릇된 방향으로 호도하는 시선들이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한 이 시대. <제보자>는 휩쓸리거나 길을 잃지 않고 또렷하게 세상을 목격하기 위해, 그리하여 누구도 억울해 하거나 부당함을 겪지 않기 위해 언론과 대중이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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